새로오신 상사가 있다. 나름 일 잘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지만 정치는 잘 못했던지 진급 경쟁에서 밀려나 우리 회사로 왔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분이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박식하고 프로젝트가 어떤 개발 방향으로 진행해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할 줄 아는 분이다. 그런 그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 왔는지 모르지만 난 그의 존재에 기대가 있었다. 그가 경영진으로부터의 방패막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며 회사의 규율을 잘 따르고 있다. 본인이 비록 큰 곳에 근무하다가 왔지만 이 곳의 규칙을 우습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나름의 문화가 있을꺼고 그 문화를 존중하고 따르겠다고 했다. 실망이다. 어떻게든지 그로인해 회사가 새롭게 바뀌기를 기대했는데.
그가 이 곳에 처음 부임해 팀원들과 회의를 가졌을 때가 생각난다. 그는 본인이 다녔던 곳을 이야기했고 이 곳의 시스템에 대해서 물었다. 직원들도 평소 가지고 있던 궁금한 점에 대해서 물었다. 그가 있던 곳은 연봉인상을 어떻게 했으며 채용, 업무분배, 진행 등 직장인이라면 가질만한 일반적인 내용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눴다. 마치 우물안 개구리들이 밖에 다녀온 이에게 바깥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을 듣는 자리같았다.
그의 당찬 마음도 읽을 수 있었다.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부분은 개선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무언가 행동이 있을꺼라 믿었다.
그의 당찬 소리는 그냥 하는 소리가 되었다. 아직까지 그가 힘쓴 부분은 없다. 회식이 필요하면 법인카드 빌려준다는 얘기만 여러번 들었을뿐. 코로나로 회식도 못하는 지금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얼마나 오래 근무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작정하고 은퇴할때까지 조용히 지내는 전략인지는 모르겠다.
대표는 그에게 과업을 맡겼다. 그가 있기 때문에 과업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추진하라 명했다.
그는 사내 메신저에 그룹을 만들고 대표이사도 포함시켰다. 그건 그의 실책이 되었다. 대표이사를 포함시켜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잘하고 있는지 어필하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그가 공개적으로 성토당하는 공간이 되고 말았다.
그는 나름대로 맡은 업무에 대해 시장조사를 하고 개발대비 효과에 대해 분석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해서는 안되는 손해보는 프로젝트라 결론냈다. 시장은 거의 없고 개발비는 산떠미처럼 크고 인증 작업도 만만치 않은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 판단했다. 회사를 생각해서 분석하고 보고했지만 대표에게 엄청 까였다. "시장이 없다는거 힘들다는거 다 알고있습니다. 어떻게 개발할지에만 신경써주세요. 시장 상황을 극복하는게 혁신기업의 정신입니다" 대충 대표가 한 말의 요약이다. 느낌은 '엉뚱한 소리하지말고 연구개발에만 신경쓰세요'다.
이건 나중에 안 사실이다. 어느 날 나까지 TF팀 메신저에 추가되어 보게되었다. 메신저에 추가되면 추가된 다음부터 올려진 내용을 볼 수 있는게 아니라 과거에 올려진 자료도 다 볼 수 있었다. 대표가 한 소리 하는 문자도 그렇게 보게 되었다. 모두가 다 보는 공간에 대표가 올린 문자다. 상사의 체면도 있지. 순화된 착한 글로 적혀있지만 속내는 모두 다 읽을 수 있다.
그가 아직 대표의 성격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표가 무언가에 꽂히면 누구도 말릴 수 없다. 아이디어가 좋지 않다고 해도 '뭘래 좋은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이 못 알아본다'고 생각하는지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을 이기려 든다. 그걸 아는 사람은 굳이 애써서 대표와 대화하지 않는다. 그냥 듣고만 있다가 대표가 시키는 일만한다.
그는 메신저에 다른 팀원을 끌어들였다. 자신의 생각를 다른 사람과 공유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기말에 공감해 달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회사 메신저에서 지식을 공유하면 일이 줄지 않고 업무가 늘어나는걸 모르나. 누구도 의견을 내지 않았다. 대표가 들어있는 단톡방에 누가 함부로 자기 의견을 낼까? 좋은 이야기만 적어야 한다.
혁신을 부르짖는 대표에게 어떤 이야기가 통할까? 어떤 변병도 이유도 있어서는 안된다. 대표가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방법이 없다. 언젠가 조용히 흐지부지 사라질때까지 견디는게 상책이다.
그도 이제 회사에 적응해 나가고 있다. 처음에 그랬던거처럼 로마의 법을 잘 따르려고 한다. 회사의 벽에 맞서지 않고 순응하는 길을 택한거로 보인다. 희망하나가 사라졌다.
'푸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념] 사람없다 말하지 마세요. (0) | 2021.10.06 |
---|---|
[푸념]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것 (0) | 2021.09.11 |
[푸념] 열정죽이는 보안 (0) | 2021.09.09 |
[푸념] 머리 속에 있는 걸 쏙 (0) | 2021.09.08 |
[푸념] 오피스 청소 아줌마 (0) | 2021.09.07 |